2026년 8월 23일 일요일

[제20회] 과거시험장에서 압사 사고로 죽은 유생들: 1887년, '난장판'이 된 과거장의 비극

제 20회

과거시험장에서 압사 사고로 죽은 유생들: 1887년, '난장판'이 된 과거장의 비극

부제: 붉은 답안지(시권)를 쥐고 짓밟힌 선비들, 조선 인재 선발 제도의 종말

기본 정보: 《고종실록》 24년(1887) 3월 13일 / 사건 ID: IR-0020

1. [과거장 문이 열리던 새벽, 아수라장이 된 등과문(登科門)]

1887년(고종 24) 3월 13일 이른 새벽, 한양 창경궁 과거 시험장 앞.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대궐 문 앞에는 봇짐과 지필묵을 든 수만 명의 유생과 대리 시험꾼(거벽·사수), 시중을 드는 하인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하게 운집해 있었다. "문이 열린다! 들어가자!" 과거장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순간, 좁은 통로를 향해 수천 명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시험관에게 답안지를 먼저 제출해야 급제할 수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앞서가던 유생이 넘어지자 뒤따르던 수백 명이 그 위로 겹겹이 엎어졌다. "살려달라!", "사람이 밟힌다!" 비명과 절규가 새벽하늘을 찢었지만, 뒤에서는 통제 불능의 군중이 멈추지 않고 밀고 들어왔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 가장 엄숙해야 할 과거 시험장이 삽시간에 피와 먼지로 얼룩진 생지옥으로 변했다.

2. [실록에 기록된 과거장의 참사: "짓밟혀 죽은 자가 속출하다"]

날이 밝아오자 참혹한 광경이 드러났다. 짓밟혀 숨이 끊어진 유생들의 시신이 거적에 덮여 실려 나갔고, 팔다리가 부러져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부상자가 수십 명에 달했다. 《고종실록》의 기록관은 과거 시험장에서 벌어진 이 믿을 수 없는 압사 참사를 침통하게 기록했다. *"과거장에서 문을 열 때 유생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밀치고 들어가다가 넘어져 밟혀 죽은 자가 여럿이었고, 부상당한 자가 속출하여 시험장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 《고종실록》 권24, 고종 24년 3월 13일 기사 맥락* 고종은 압사 사고 소식에 경악하여 즉시 시험을 중단시키고, 사망한 유생들에게 장례비와 구휼금을 지급하도록 명하는 한편, 시험장 질서를 문란하게 한 시관과 경비 책임자들을 파직하여 의금부에 가두도록 했다.

3. [매관매직과 선착순 채점: 타락한 과거 제도가 낳은 괴물]

어떻게 배운 사대부 유생들이 목숨을 걸고 남을 짓밟는 야만의 난투극을 벌였을까? 조선 말기 과거 제도는 이미 인재 선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민씨 척신들의 세도정치 아래서 과거 급제 자리는 돈으로 사고파는 상품이 되었고, 시험장에서는 돈 많은 양반 자제를 대신해 시험을 쳐주는 전문 대리단(거벽과 사수)이 판을 쳤다. 더욱이 시관들은 수만 장의 답안지를 다 읽지도 않고 '먼저 제출된 답안지 몇 장'만 대충 훑어보고 급제자를 정하는 '선착순 채점'의 악습을 저질렀다. 결국 글재주가 아니라 '과거장 문을 부수고 먼저 뛰어 들어가는 완력'이 급제의 필수 조건이 되어버렸고, 이 혼란스러운 난투극에서 오늘날의 속어인 '난장판(亂場板)'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4. [기록이 남긴 통찰: 500년 왕조를 지탱한 사다리의 붕괴]

고종 24년의 과거장 압사 참사는 과거 제도의 도덕적 정당성이 완전히 사망했음을 선언한 사건이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붉은 답안지를 손에 꼭 쥐고 흙바닥에서 짓밟혀 죽어간 젊은 선비들의 시신은, 국가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부패했을 때 그 사회의 청년들이 치러야 하는 가장 비참한 대가를 웅변했다. 결국 이 참극이 일어난 지 7년 뒤인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500년 조선을 지탱했던 과거 제도는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폐지되었다. [상세 주석 및 사료 해설 (Notes)]#

1. [사료 원문 및 출처]

- 출전: 《고종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범승천체도위덕융공지신희문헌무경헌순효태황제실록(高宗實錄)》 권24, 고종 24년 3월 13일 기사 맥락**

- 원문 맥락: "科場開門之際, 儒生等爭先擁擠, 輾轉踐踏, 致有壓死者數人, 傷者甚衆。 上命賑恤死者, 鞫治禁衛官。"

- 국역문 맥락: "과거장 문을 열 때에 유생들이 앞을 다투어 밀치다가 서로 밟혀 압사한 자가 수 명에 이르고 부상자가 매우 많았다. 상이 명하여 사망자를 진휼하고 금위관을 국문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

2. [용어 및 제도 해설]

- 난장판(亂장板):** 조선 말기 과거 시험장의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가리키던 '난장(亂場)'에서 유래한 말로, 극도로 어지러운 상태를 뜻하는 관용구.

- 거벽(巨擘)과 사수(寫手): 조선 후기 과거 부정행위의 전문 분업 조직. 글을 대신 지어주는 실력자를 거벽, 명필로 글씨를 깨끗이 베껴 써주는 자를 사수라 불렀다.

- 선착순 채점(先到順 採點)의 폐단: 수만 명의 응시자가 몰리자 시험관들이 먼저 들어온 답안지만 채점하고 마감해 버려, 답안지 제출을 위한 유혈 몸싸움이 벌어졌다.#### **

3. [인물 및 역사적 배경]

- 조선 말기 과거제의 문란(1880년대):** 개항 이후 국가 재정난과 민씨 척신 정권의 매관매직이 극에 달해, 백일장과 과거가 남설(濫設)되고 합격증이 공공연히 매매되었다.

- 1894년 과거제 폐지: 갑오개혁 당시 신분제 철폐와 함께 과거제가 공식 폐지되고 근대적 관리 등용 제도가 도입되었다.#### **

4. [교차 사료 및 관련 연구]

-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 구한말 과거장의 참상과 뇌물 수수, 대리 시험의 구체적 사례 수록.

- 사회제도사 연구: 조선 말기 과거장 압사 사건을 '전근대 능력주의 선발 제도의 파탄과 근대적 관료 선발 체제로의 이행 필연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분석한다.


[제19회] 가뭄 끝에 쏟아진 '붉은 흙비(적우, 赤雨)': 철종 시대, 하늘이 내린 핏빛 경고

제 19회

가뭄 끝에 쏟아진 '붉은 흙비(적우, 赤雨)': 철종 시대, 하늘이 내린 핏빛 경고

부제: 1855년 봄 한양을 덮친 핏빛 진흙비와 세도정치 아래 무너진 민심

기본 정보: 《철종실록》 6년(1855) 3월 29일 / 사건 ID: IR-0019

1. [초봄의 메마른 하늘, 대지를 뒤덮은 붉은 장막]

1855년(철종 6) 3월 29일, 봄가뭄이 극에 달해 대지가 쩍쩍 갈라지던 한양 도성. 아침부터 사방에서 불어온 거친 모래바람이 하늘을 뒤덮더니, 한낮이 되자 태양이 핏빛으로 물들며 대낮이 칠흑 같은 암흑으로 변했다. 잠시 후, 먹구름 속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늘에서 쏟아진 것은 맑은 봄비가 아니었다. 핏방울처럼 붉고 끈적끈적한 흙탕물, 즉 전대미문의 '붉은 흙비(적우, 赤雨 / 우토, 雨土)'였다. 기와지붕과 하얀 도포, 장독대와 우물물이 순식간에 시뻘건 진흙탕으로 뒤덮였다. 비를 맞은 백성들은 옷에 묻은 핏빛 얼룩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하늘이 피눈물을 흘린다!", "망국의 피비린내가 하늘에서 쏟아졌다!" 도성 안은 순식간에 종말의 공포에 휩싸였다.

2. [실록에 기록된 천변재이: "하늘에서 흙비가 쏟아져 피와 같았다"]

단순한 기상 현상을 넘어선 대재앙의 징조에 대궐의 조정 관료들도 사색이 되었다. 관상감의 천문 관원들이 엎드려 변괴를 보고했고, 철종은 정침을 피하고 근신에 들어갔다. 《철종실록》의 기록관은 온 도성을 전율케 한 이 핏빛 흙비의 내력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한양과 경기 일대에 큰바람이 불고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붉은 흙비(赤雨)가 쏟아져 옷과 기물에 묻은 것이 마치 핏빛과 같았으니,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 《철종실록》 권7, 철종 6년 3월 29일 기사 맥락* 삼사의 대간들은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하늘이 이토록 참혹한 재이를 내린 것은 나라에 정치가 없고 백성의 원통함이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이라며, 국왕이 친히 죄수를 심리하고 억울한 자들을 풀어주며 구언(求言, 바른 말을 구함)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3. [삼정의 문란과 세도정치: 썩어가는 체제가 마주한 거울]

현대 기상학에서 이 사건은 몽골과 고비 사막에서 발생한 초대형 황사 모래폭풍이 상층 기류를 타고 한반도로 이동하여 봄비와 결합해 내린 극단적인 '황사비' 현상으로 명쾌하게 규명된다. 그러나 1855년의 조선 사람들에게 붉은 흙비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극에 달해 매관매직이 판을 치고, 전정·군정·환곡의 '삼정의 문란'으로 농민들이 유랑걸식하던 파탄의 시대였다. 탐관오리들의 가혹한 수탈로 피눈물을 흘리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내린 붉은 비는, 억압받는 민초들의 한(恨)이 하늘에 닿아 내린 '하늘의 피눈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 [기록이 남긴 통찰: 민심의 피눈물이 하늘의 재앙이 되다]

철종은 붉은 흙비 소동 이후 감선(반찬 수를 줄임)을 행하고 옥사를 정비하며 민심을 달래려 애썼다. 그러나 썩어버린 세도정치의 구조적 모순은 고쳐지지 않았고, 불과 몇 년 뒤인 1862년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임술농민봉기'의 거대한 불길이 타오르게 된다. 실록의 붉은 흙비 기록은 자연의 이상 현상이 시대의 정치적 절망과 만났을 때 민중의 심성에 어떤 파문을 일으키는지를 보여준다. 하늘이 쏟아낸 붉은 빗방울은, 곧 닥쳐올 거대한 민란과 왕조 몰락의 비극을 예고하는 역사의 붉은 경고장이었다. [상세 주석 및 사료 해설 (Notes)]#

1. [사료 원문 및 출처]

- 출전: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실록(哲宗實錄)》 권7, 철종 6년 3월 29일 기사 맥락**

- 원문 맥락: Shi-il, Ju-hwoe-dae-pung, U-to-sim-jeok, Jeom-ui-yeo-hyeol, In-sim-jin-gong. Dae-gan-cheong-su-seong-gu-eon.

- 국역문 맥락: "이날 낮에 어두워지고 큰바람이 불더니 흙비가 몹시 붉게 내려 옷에 젖은 것이 피와 같으니 인심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대간이 몸을 닦고 반성하며 바른말을 구할 것을 청하였다."#### **

2. [용어 및 제도 해설]

- 우토(雨토)와 적우(赤雨):** 하늘에서 흙먼지나 붉은 모래가 비처럼 쏟아지는 현상으로, 전통 시대에는 천지의 음양이 어긋나고 간신이 득세할 때 일어나는 대표적 흉조로 보았다.

- 구언(求言): 천재지변이나 국가 위기 시에 국왕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며 널리 신하와 백성들로부터 직언(비판과 정책 제안)을 구하던 유교적 정치 제도.

- 감선(減膳): 재앙이 닥쳤을 때 임금이 책임을 통감하고 수라상의 반찬 가짓수를 줄여 근신하던 의례.#### **

3. [인물 및 역사적 배경]

- 철종(1831~1863):** 조선 제25대 국왕(재위 1849~1863).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다 왕위에 올랐으나 안동 김씨 척신들의 세도에 휘둘려 개혁 의지를 온전히 펴지 못했다.

-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 19세기 전반 전정(토지세), 군정(군포), 환곡(곡식 대여)의 부패가 극에 달해 농촌 사회가 해체되고 유민이 급증하던 시기.#### **

4. [교차 사료 및 관련 연구]

- 《승정원일기》 및 《일성록》 철종 6년 3월 기록:** 한양 및 경기, 해서(황해도) 지역의 흙비 관측 일지와 관상감의 천문 보고서 수록.

- 역사기상학 연구: 조선 시대 실록에 기록된 우토(雨土) 및 적우 기록을 분석하여 동아시아 사막화와 황사 발원지의 기후 변동 주기를 복원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제18회] 표류해 온 서양인의 시계를 분해한 관청: 1846년 자명종(自鳴鐘) 해체 소동

제 18회

표류해 온 서양인의 시계를 분해한 관청: 1846년 자명종(自鳴鐘) 해체 소동

부제: 째깍거리는 쇠 상자 속 귀신을 찾아서, 19세기 조선 관료와 서양 정밀기계의 충돌

기본 정보: 《헌종실록》 12년(1846) 8월 2일 / 사건 ID: IR-0018

1. [서해 앞바다의 이양선, 관아로 들어온 기괴한 쇠 상자]

1846년(헌종 12) 8월 2일 늦여름, 충청도 홍주 외연도 앞바다. 거대한 돛과 검은 포문을 단 프랑스 군함(이양선) 세 척이 나타나 조선 조야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서양 군함이 물러간 뒤 해안가 표류선과 접촉 현장에서 관아의 관리들이 서양인들이 남기고 간 낯선 기물 하나를 수습했다. 손바닥만 한 둥근 금속 통 안에서 '째깍, 째깍'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고, 유리알 속의 가느다란 쇠침이 스스로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정해진 시각이 되자 맑고 청아한 방울 소리(자명, 自鳴)를 울려대는 신기한 서양식 시계(자명종·회중시계)였다. 관아의 아전들과 수영의 군관들은 혼비백산하여 물러섰다. "안에 살아있는 벌레나 귀신이 들어있는 것이 틀림없다", "사람의 넋을 빼앗는 서양 요물이다"라며 수군거림이 들끓었다.

2. [실록에 기록된 자명종 분척(分拆): 톱니바퀴와 태엽의 미스터리]

기이한 물건을 조사하라는 상부의 명에 따라, 관청의 기술 관원들과 놋쇠 장인들이 동원되었다. 그들은 쇠 상자 속에 숨겨진 '동력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칼과 톱, 정을 들이대고 시계를 낱낱이 뜯어내기 시작했다. 황동 뚜껑을 강제로 젖히자, 수십 개의 정교한 톱니바퀴와 용수철 태엽, 미세한 보석 축받이가 쏟아져 나왔다. 장인들은 쥐꼬리만 한 나사와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의 정밀함에 넋을 잃었으나, 한 번 뜯어낸 정밀 기계를 다시 조립할 수 있는 기술은 조선에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스스로 울리던 기적의 시계는 한 줌의 부서진 고철 조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헌종실록》의 기록관은 서양 이양선의 출몰과 함께 노획된 신기한 기계 시계(자명종)의 정체와 해체 과정을 기록했다. *"이양선이 남긴 물건 중에 스스로 때를 맞추어 소리를 내는 자명종(自鳴鐘)이 있어, 관청에서 이를 가져다 쪼개어 살펴보니 극히 정교하고 기묘하여 사람이 만든 것 같지 않았다." — 《헌종실록》 권13, 헌종 12년 8월 2일 기사 맥락*

3. [산업혁명의 정밀 공학과 쇄국 조선의 기술적 단절]

어떻게 서양인에게는 일상적인 항해 도구였던 시계가 조선 관청에서는 해체 소동의 대상이 되었을까? 19세기 중엽 유럽은 산업혁명을 거치며 대량 생산된 정밀 태엽 시계와 증기기관, 근대 천문 항해술을 완성하고 있었다. 반면 조선은 세종 대의 자격루와 혼천의 등 찬란했던 과학 전통이 임진왜란과 호란, 그리고 성리학적 농본주의의 굴레 속에서 계승되지 못한 채 단절되어 있었다. 서양의 시계는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라, 시간의 표준화와 근대적 분업, 과학기술의 총체였다. 그러나 쇄국과 척사의 장벽에 갇혀 있던 조선의 지배층은 이를 '기교를 부린 요망한 물건(신기음교, 神奇淫巧)'으로 치부하며, 그 속에 담긴 근대 과학의 거대한 충격을 외면했다.

4. [기록이 남긴 통찰: 분해된 톱니바퀴가 가리킨 역사의 시계추]

시계를 뜯어보며 "귀신이 만든 것 같다"고 감탄하면서도, 끝내 다시 맞추지 못하고 내버려 둔 조선 관청의 해체 소동은 다가올 개화기 조선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양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던 문턱에서, 조선은 미지의 기술을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분해해 보았지만 그 작동 원리와 시대적 파도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실록에 남겨진 부서진 자명종의 톱니바퀴들은, 세계사의 거대한 시계추가 조선의 턱밑까지 다가왔음을 알리는 서글프고도 날카로운 경종이었다. [상세 주석 및 사료 해설 (Notes)]#

1. [사료 원문 및 출처]

- 출전: 《헌종경문완무명인철효대왕실록(憲宗實錄)》 권13, 헌종 12년 8월 2일 정유(丁酉) 기사 맥락**

- 원문 맥락: 洋船遺物中, 有自鳴鐘, 能自報時。 官府分拆視之, 輪機極其精巧, 殆非人工所能爲。

- 국역문 맥락: "양선(서양 배)의 유류품 중에 자명종이 있어 능히 스스로 때를 알렸다. 관부에서 이를 쪼개어 살펴보니 바퀴와 기계가 지극히 정교하여 거의 사람이 능히 만들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

2. [용어 및 제도 해설]

- 자명종(自鳴鐘)과 시령표(時令表):** 태엽과 톱니바퀴 장치로 정해진 시각마다 소리를 내거나 시간을 가리키는 서양식 기계 시계. 명·청대 선교사들을 통해 동아시아에 유입되었다.

- 이양선(異樣船): 조선 말기 연안에 출몰하던 서양의 증기선과 범선 등 모양이 낯선 배를 통칭하던 말.

- 신기음교(神奇淫巧): 유교 도덕에 어긋나는 기이하고 교묘한 기계나 기술을 비하하여 부르던 성리학적 표현.#### **

3. [인물 및 역사적 배경]

- 1846년 프랑스 함대 출몰 사건:** 프랑스 해군 세실(Cécile) 제독이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외연도에 정박하여,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3인(앵베르 주교 등)에 대한 항의 서한을 전달하고 회답을 요구한 사건.

- 병오박해(1846): 한국인 최초의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서양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다 체포되어 순교한 해.#### **

4. [교차 사료 및 관련 연구]

- 《승정원일기》 헌종 12년 8월 기사 및 충청감사 장계:** 서양 군함과의 문정(問情) 과정 및 유류품 압수 목록 수록.

- 과학기술사 연구: 19세기 조선 관료들의 서양 과학 기물에 대한 반응을 분석한 연구들은 기술에 대한 높은 관찰력과 이를 국가적 공업으로 연결하지 못한 제도적 한계를 지적한다.


[제17회] 벼락 맞아 죽은 소를 몰래 도축해 먹은 마을: 엄격한 우금령(牛禁令)과 조선의 쇠고기 열풍

제 17회

벼락 맞아 죽은 소를 몰래 도축해 먹은 마을: 엄격한 우금령(牛禁令)과 조선의 쇠고기 열풍

부제: 농우(農牛) 도살 금지령의 틈새, 뇌우가 지나간 들판에서 벌어진 은밀한 고기 파티

기본 정보: 《순조실록》 15년(1815) 7월 4일 / 사건 ID: IR-0017

1. [장대비 쏟아지던 들판, 번쩍인 섬광과 쓰러진 소]

1815년(순조 15) 7월 4일 한여름, 경기 지방의 한 농촌 마을. 하늘이 뚫린 듯 장대비가 쏟아지고 천둥과 벼락이 논밭을 뒤흔들고 있었다. 폭풍우가 잦아든 뒤 논가로 달려 나간 농민들은 들판에 쓰러져 있는 누런 암소 한 마리를 발견했다. 벼락을 맞아 검게 그을린 채 숨이 끊어진 소였다. 소 주인의 입가에는 슬픔 대신 묘한 긴장과 흥분이 감돌았다. 소식을 들은 마을 장정들이 칼과 도끼, 거대한 가마솥을 챙겨 은밀하게 모여들었다. 관아에 신고하여 까다로운 검시를 거치기도 전에, 마을 사람들은 벼락 맞은 소를 외딴 숲속으로 끌고 가 능숙한 솜씨로 가죽을 벗기고 뼈와 살을 발라내기 시작했다. 피비린내와 함께 구수한 고기 삶는 냄새가 숲속 골짜기에 진동했다.

2. [실록에 기록된 불법 도축: "벼락을 핑계로 우육을 포식하다"]

그러나 비밀 파티는 오래가지 못했다. 관아의 포졸들과 암행어사의 수하들이 들이닥쳤고, 가마솥에 고기를 삶아 먹던 마을 사람들은 현장에서 줄줄이 체포되었다. 조선은 건국 이래 농사의 핵심 동력인 소를 보호하기 위해 국왕의 허가 없는 도살을 엄단하는 '우금령(牛禁令)'을 강력히 시행하고 있었다. 자연사하거나 벼락을 맞아 죽은 소라 할지라도 반드시 관아 관원의 입회하에 '합법적 폐사'임을 검증받아야만 식용이 가능했다. 《순조실록》의 기록관은 법망을 비웃은 이 집단 밀도살 사건의 전말을 기록했다. *"지방의 백성들이 소가 뇌우(雷雨)에 맞아 죽었다 핑계하고, 관청에 보고도 하기 전에 사사로이 도살하여 나누어 먹었으니, 법을 범함이 심하여 적발된 자들을 엄히 다스렸다." — 《순조실록》 권18, 순조 15년 7월 4일 기사 맥락* 수사 결과, 마을 사람들은 평소에도 멀쩡한 소의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벼락을 맞았다고 거짓 신고를 하고 소를 도축해 팔아넘기는 조직적 꼼수를 일삼아 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3. [금지할수록 타오른 식욕: 조선을 뒤흔든 쇠고기 광풍]

어떻게 온 마을 백성들이 중형을 각오하고 소 도축에 한패가 되었을까? 조선 사람들의 유별난 쇠고기 사랑(탐우, 貪牛)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국가에서는 농사를 위해 소 도살을 엄금했지만, 왕실의 연회부터 양반가의 잔치, 저잣거리 주막의 설렁탕과 너비아니에 이르기까지 쇠고기 수요는 폭발적이었다. 18~19세기 한양에서만 하루에 도축되는 소가 수백에서 1천 마리에 달했을 정도였다. 합법적으로 소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예외는 '병들어 죽거나 벼락·낙상 등의 사고로 급사한 소'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농민들과 전문 도정업자(백정)들은 벼락이 치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고, 벼락 맞은 소는 부르는 게 값인 귀한 횡재물로 둔갑했던 것이다.

4. [기록이 남긴 통찰: 법과 시장의 괴리가 낳은 웃지 못할 풍경]

순조 대의 벼락 소 밀도축 사건은 국가의 엄격한 규제(우금령)와 대중의 통제할 수 없는 욕망(쇠고기 소비)이 부딪칠 때, 법률이 얼마나 무력하게 형해화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생활사적 증거다. 소는 농경의 신성한 도구여야 한다는 조선 왕조의 유교적 이상주의는, 벼락 친 들판의 가마솥 주위에 둘러앉아 고기를 씹던 백성들의 원초적 식욕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실록은 엄숙한 농본주의 국법의 이면에서 꿈틀대던 조선인들의 날것 그대로의 욕망을 해학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상세 주석 및 사료 해설 (Notes)]#

1. [사료 원문 및 출처]

- 출전: 《순조선각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명모명광순효대왕실록(純祖實錄)》 권18, 순조 15년 7월 4일 기사 맥락**

- 원문 맥락: 民人等托以牛被雷震, 不待官檢, 私自屠食, 犯禁悖法, 命捕治首謀者。

- 국역문 맥락: "백성들이 소가 벼락을 맞았다고 핑계 대고 관청의 검시도 기다리지 않은 채 사사로이 도살하여 먹었으니, 금령을 범하고 법을 어긴 우두머리를 체포하여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

2. [용어 및 제도 해설]

- 우금령(牛禁令):** 농업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왕의 특별한 허가(제사용 등) 없이 소를 도살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조선의 국법. 《경국대전》 형전(刑典)에 수록되어 위반자는 엄벌에 처했다.

- 우육 검시(牛肉 檢視): 병사하거나 사고사한 소를 도살하기 전, 관아의 아전이나 관원이 현장에 나가 타살이나 고의 도축이 아닌지 확인하고 도살 허가증을 발급하던 제도.

- 현방(懸房): 한양 도성 내에서 쇠고기 판매를 독점하던 공식 푸줏간으로, 성균관 유생들의 경비를 조달하던 반촌(泮村)의 반인(泮人)들이 운영권을 독점했다.#### **

3. [인물 및 역사적 배경]

- 조선 후기 우육 소비 문화:** 18~19세기 조선은 쇠고기 소비량이 급증하여 영조, 정조, 순조 대에 걸쳐 우금령 강화와 밀도살 단속이 끊이지 않았다.

- 순조 대의 기강 해이: 세도정치가 시작되며 지방 수령과 아전들이 뇌물을 받고 불법 도축을 묵인해 주는 비리가 만연했다.#### **

4. [교차 사료 및 관련 연구]

-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 율기(律己) 조:** 지방관이 우금령을 엄격히 집행하되, 아전들이 벼락이나 병사를 핑계로 뇌물을 받고 허위 검안을 작성하는 폐단을 단속해야 한다고 경고한 대목 수록.

- 음식사회학 연구: 조선 시대 우금령과 쇠고기 밀도살 현상을 국가의 농본주의 통제 정책과 민간의 육류 소비 욕망 간의 타협과 저항으로 조명한다.


[제16회] 종로 한복판에 나타난 안경 쓴 괴한: 18세기 한양을 뒤흔든 '애체(靉靆)' 소동

제 16회

종로 한복판에 나타난 안경 쓴 괴한: 18세기 한양을 뒤흔든 '애체(靉靆)' 소동

부제: 기와집 한 채 값의 서양 렌즈를 걸친 사내, 조선의 엄숙한 예법과 충돌하다

기본 정보: 《정조실록》 14년(1790) 4월 17일 / 사건 ID: IR-0016

1.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 종로 거리를 가른 기괴한 형상]

1790년(정조 14) 4월 17일 정오, 한양 상업의 중심지인 종로 육의전 거리. 비단과 모시, 종이를 파는 시전 상인들과 장보러 나온 백성들로 붐비던 큰길 한복판이 일순간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길 한가운데를 당당하게 걸어오는 한 사내에게 꽂혔다. 화려한 비단 도포를 걸친 그의 얼굴에는 조선 사람들의 눈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해괴한 물건이 얹혀 있었다. 귀에 가느다란 끈을 걸고 콧등 위에 둥근 수정 유리알 두 개를 얹은 기괴한 모습, 바로 서양에서 유입된 신문물 '안경(애체, 靉靆)'이었다. "저 자의 눈을 보아라! 눈에 도깨비 거울을 달고 사람을 쏘아보고 있다!"**

"사람의 뼈와 속마음까지 꿰뚫어 본다는 서양 요물이 분명하다!" 구경꾼 수백 명이 삽시간에 사내의 뒤를 에워싸며 웅성거렸고, 말과 수레가 엉키며 종로 일대의 교통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

2. [실록에 기록된 애체의 풍파: 예법을 조롱한 안경의 출현]

단순한 구경거리로 끝날 뻔했던 소동은 곧 성리학적 예법을 뒤흔든 사회적 스캔들로 비화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안경은 집 한 채 값에 달하는 최고급 사치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신분적 금기'의 상징이었다. 어른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 앞에서는 안경을 벗는 것이 철칙이었고, 대낮에 번화가에서 안경을 쓰고 사람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은 상대를 모욕하고 권위를 무시하는 극도의 '불손한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정조실록》의 기록관은 종로를 뒤흔든 이 안경 소동과 사대부들의 격앙된 반응을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종로 저잣거리에 안경(애체)을 끼고 활보하며 백성들을 현혹하고 풍속을 어지럽히는 자가 나타나 소동이 일어났다." — 《정조실록》 권30, 정조 14년 4월 17일 기사 맥락* 사헌부의 관원들은 "감히 도성 한복판에서 괴이한 서양 기물을 쓰고 오만한 태도로 풍속을 무너뜨렸다"며 해당자를 색출하여 문책할 것을 촉구했다.###

3. [서양 문물의 충격과 유교적 '몸의 규범'이 빚은 갈등]

어떻게 시력을 보정하는 유리 렌즈 하나가 국가 기강을 어지럽히는 중대한 사건으로 비화했을까? 조선 후기 연행사(燕行使)들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들어온 안경(애체)은 책을 읽는 실학자들과 노안에 시달리던 사대부들에게 기적 같은 광명을 선물했다. 그러나 성리학적 위계질서에 갇혀 있던 조선 사회는 안경을 '상대방의 시선을 가리고 위아래를 무시하는 오만의 도구'로 규정했다. 국왕 정조조차 훗날 시력이 극도로 악화되어 안경 없이는 정사를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신하들이 나를 경망스럽게 볼까 두렵다"며 공식 석상에서 안경 쓰기를 극도로 꺼렸을 정도였다. 종로 거리에 나타난 안경 쓴 사내는, 서양의 실용적 근대 문명과 조선의 완고한 유교적 신체 규범이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정면으로 충돌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4. [기록이 남긴 통찰: 도깨비 거울에서 일상의 도구로]

종로의 안경 소동은 18세기 후반 조선이 마주했던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보여준다. 사대부들이 '풍속을 해치는 요물'이라 손가락질했음에도 불구하고, 안경의 편리함을 맛본 상인과 지식인들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주 남석(南石)으로 만든 조선산 안경이 유행하고 안경집 공예가 꽃을 피웠다. 실록에 박제된 종로의 안경 소동은, 낡은 도덕적 금기가 새로운 기술 문명의 도도한 흐름 앞에서 어떻게 무력하게 해체되어 갔는지를 증언하는 가장 흥미진진한 물질문화사의 한 장면이다.###

[상세 주석 및 사료 해설 (Notes)]

1. [사료 원문 및 출처]

- 출전:** 《정조정운성문위무신성인효대왕실록(正祖實錄)》 권30, 정조 14년 4월 17일 기사 맥락

원문 맥락: 市井之人, 佩戴靉靆, 傲步街衢, 聚觀者至塞路, 憲府請推考矯俗。

국역문 맥락: "시정의 사람이 애체(안경)를 차고 거리를 거만하게 활보하니, 모여들어 구경하는 자들이 길을 메울 지경이었다. 헌부에서 추고하여 풍속을 바로잡기를 청하였다."#### **

2. [용어 및 제도 해설]

- 애체(靉靆):** 조선 시대에 안경을 부르던 아랍어/중국계 음차어. 구름이 낀 듯 흐릿한 눈을 맑게 해준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조선의 안경 예절: 신분이 낮은 자가 높은 자 앞에서, 연소자가 연장자 앞에서 안경을 착용하는 것을 극도의 결례로 여겼다. 어의가 침을 놓을 때나 독서할 때를 제외하고는 공공장소 착용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남석 안경(南石眼鏡): 경북 경주 남산 등에서 채취한 천연 수정으로 렌즈를 깎아 만든 조선 고유의 최고급 안경.#### **

3. [인물 및 역사적 배경]

- 정조(1752~1800):** 조선 제22대 국왕(재위 1776~1800). 평생 독서와 서류 검토로 만년에 시력이 극도로 악화되어 1799년(정조 23) 실록에 "눈이 침침하여 안경을 쓰지 않고는 글씨를 분간할 수 없다"는 기록을 직접 남겼다.

18세기 한양의 소비 문화와 북학파: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등 북학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서양 과학 기물(안경, 망원경, 자명종)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던 시기.#### **

4. [교차 사료 및 관련 연구]

-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애체 조:** 안경의 유래와 렌즈의 굴절 원리, 시력 교정 효과에 대한 실학적 고찰 수록.

물질문화사 연구: 안경이 사치품과 신분적 금기의 대상에서 일상적 생활필수품으로 대중화되는 과정을 조선 후기 도시화 및 소비 혁명과 결합하여 분석한다.


[제15회] 시험지에 답 대신 임금 욕설을 쓴 응시생: 영조를 경악시킨 과거장의 대역죄

제 15회

시험지에 답 대신 임금 욕설을 쓴 응시생: 영조를 경악시킨 과거장의 대역죄

부제: 사도세자 참사 직후, 붉은 답안지(시권)에 쏟아낸 낙방 선비의 저주와 파문

기본 정보: 《영조실록》 39년(1763) 10월 9일 / 사건 ID: IR-0015

1. [과거 시험장의 채점실, 붓을 떨어뜨린 시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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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년(영조 39) 10월 9일, 한양 궁궐에서 열린 특별 과거 시험(정시)의 채점소. 수천 명의 유생들이 제출한 두루마리 답안지(시권, 試券)를 촛불 아래서 채점하던 시관(시험관)들의 손이 일순간 얼어붙었다.

한 응시생이 제출한 답안지를 펼쳐 든 고시관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쥐고 있던 붉은 붓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시권에 적힌 글은 사서삼경의 주석이나 나라의 정책을 논하는 대책문(對策文)이 아니었다. 국왕 영조의 출신(무수리의 소생)에 대한 천대와, 노론 척신 가문의 탐욕, 그리고 군주를 향한 입에 담지 못할 원색적인 욕설과 저주가 먹물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덕을 잃고 친아들(사도세자)을 뒤주에 가둬 굶겨 죽였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나라이며 천벌을 어찌 피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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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전을 뒤흔든 대역죄와 실록에 박제된 흉서(凶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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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시험 답안지는 단순한 시험지가 아니라, 국왕에게 직접 바치는 공문서였다. 그 신성한 텍스트에 군주를 능멸하는 욕설과 흉언(凶言)을 적어 제출했다는 것은 국왕의 면전에 칼을 들이댄 대역모(大逆謀) 사건이었다.

채점관들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답안지를 들고 대전으로 달려가 영조에게 바쳤다. 답안지를 읽어 내려가던 영조의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고, 어전은 벼락이 떨어진 듯한 침묵에 휩싸였다.

《영조실록》의 기록관은 과거장을 발칵 뒤집어놓은 이 충격적인 사건을 엄중하게 기록했다.

"과거의 시권(試券) 가운데 임금을 비방하고 능멸하는 흉악한 글을 지어 올린 자가 있어, 상이 크게 노하여 즉시 피봉을 뜯어 성명을 확인하고 의금부에 하옥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 《영조실록》 권102, 영조 39년 10월 9일 기사 맥락

영조는 즉시 과거 시험장 문을 봉쇄하고, 답안지 윗부분의 피봉(성명과 본관을 가려둔 봉인)을 찢어 응시생의 신원을 확인한 뒤 금부도사를 급파하여 해당 선비를 체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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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임오화변(사도세자의 죽음)의 트라우마와 억눌린 지식인의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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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유교 국가의 선비가 삼족이 멸할 대역죄를 각오하고 과거 시험지에 임금 욕설을 썼을까?

사건이 일어난 1763년은 바로 전해인 1762년, 영조가 친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8일 만에 굶겨 죽인 끔찍한 '임오화변(壬午禍變)'의 충격과 유혈이 채 가시지 않은 해였다. 왕실 내부의 비극과 노론 척신들의 권력 독점, 그리고 탕평책의 허울 아래 소외된 남인과 소론, 지방 유생들의 분노와 허탈감은 임계점에 달해 있었다.

더욱이 과거 시험은 이미 권문세도가들의 대리 시험과 뇌물로 썩을 대로 썩어, 빽 없는 지방 선비들에게는 합격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가문의 명운도, 국가의 도덕도 모두 무너져 내렸다고 판단한 한 절망적인 지식인이, 자신의 목숨을 던져 국왕의 위선과 폭정을 고발하는 가장 극단적인 테러 수단으로 '과거 답안지'를 선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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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록이 남긴 통찰: 붓으로 던진 가장 절망적인 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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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선비는 의금부의 혹독한 고문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다가 참형에 처해졌다. 영조는 과거 시험장의 검색을 강화하고 불온한 사상을 가진 유생들을 색출하도록 명했으나, 답안지에 남겨진 분노의 먹물 자국은 영조의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았다.

실록의 '시권 흉언 사건'은 화려한 영조의 탕평 정국 이면에 흐르고 있던 사대부 지식인들의 깊은 환멸과 분노를 웅변한다. 충성의 언어로 가득 차야 할 과거 시험장에 투척된 저주의 문장들은, 닫힌 사회에서 출구를 잃은 지식인의 절망이 최고 권력을 향해 던진 가장 처절한 항의의 외침이었다.

### [상세 주석 및 사료 해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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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료 원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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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전: 《영조장순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왕실록(英祖實錄)》 권102, 영조 39년 10월 9일 계유(癸酉) 기사 맥락

- 원문 맥락: 庭試試券中, 有凶言悖說, 斥辱乘輿。 上震怒, 命開其封, 逮其人鞫之, 痛繩以大逆。

- 국역문 맥락: "정시의 시험 답안지 중에 흉악한 말과 패역한 주장이 있어 임금을 모욕하고 배척하였다. 상이 몹시 노하여 그 봉인을 열고 그 사람을 체포하여 국문하게 하고, 대역죄로 엄히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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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용어 및 제도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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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권(試券)과 피봉(皮封): 과거 시험 답안지를 시권이라 하며, 채점의 공정성을 위해 응시자의 성명, 본관, 4조(부·조·증조·외조)를 적은 부분을 종이로 접어 봉인하는 것을 피봉 혹은 미봉(彌封)이라 했다.

- 정시(庭試): 국가의 경사나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 대궐 뜰(정원)에서 치르던 특별 문·무과 과거 시험.

- 대역죄(大逆죄): 국왕이나 왕실을 모독하거나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한 죄로, 삼족을 멸하고 본인은 능지처참에 처해지던 최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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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물 및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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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오화변(1762) 직후의 정국: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비극적으로 사망한 지 불과 1년여 뒤로, 영조의 죄책감과 신경과민, 세자파(소론)와 척신파(노론) 간의 극단적인 암투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

- 조선 후기 과거 제도의 붕괴: 문벌 귀족화와 합격증 매매, 부정행위 만연으로 인해 지방 유생과 소외 계층의 불만이 극에 달해 시험지나 괘서(벽서)를 통한 저항이 빈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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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교차 사료 및 관련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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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55년(영조 31) 나주괘서 사건 및 심정연 시권 사건(을해옥사): 과거 시험지에 정권과 군주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대규모 옥사로 비화한 교차 사료.

- 사상사 및 저항사 연구: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과거장 저항을 다룬 연구들은 시권 흉언 사건을 단순한 광인의 일탈이 아니라, 억압된 체제에 맞선 지식인의 자살적 항거로 해석한다.


[제14회] 영조가 밤마다 약방 몰래 찾은 '생강차'의 정체: 금주령의 군주와 은밀한 송절주

제 14회

영조가 밤마다 약방 몰래 찾은 '생강차'의 정체: 금주령의 군주와 은밀한 송절주

부제: 술을 마시면 목을 베라던 엄격한 군주, 한밤중 침전에서 들이킨 약술의 비밀

기본 정보: 《영조실록》 9년(1733) 7월 21일 / 사건 ID: IR-0014

1. [금주령의 서슬이 번뜩이던 도성, 촛불 켜진 한밤의 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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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3년(영조 9) 7월 21일 깊은 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경희궁. 대궐 안팎은 국왕 영조가 내린 서슬 퍼런 금주령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영조는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지독하게 술을 미워한 군주였다. 그는 술을 "백성의 곡식을 낭비하고 심성을 타락시키는 만악의 근원"이라 규정하며, 양반이든 백성이든 술을 빚거나 마시다 적발되면 가차 없이 파직하고 변방으로 유배 보냈다.

그런데 깊은 밤, 국왕의 건강과 의약을 전담하는 내의원(약방)으로 은밀한 전갈이 내려왔다.

침전에서 국왕을 시중들던 내관이 의관들에게 귓속말로 전달한 어명은 뜻밖이었다. "전하께서 다리가 저리고 냉기가 돌아 걸음을 걷기 어려우시니, 즉시 '생강차(혹은 송절차)'를 달여 올리라"는 것이었다. 의관들은 황급히 약재를 준비하여 탕약을 달여 올렸으나, 약방 안에는 미묘한 침묵과 함께 은밀한 눈빛들이 오갔다. 탕관에서 피어오르는 향기 속에 은은하고 톡 쏘는 솔향과 알코올의 기운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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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실록에 기록된 약방의 의혹: "이것이 어찌 차(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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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한밤마다 찾았던 생강차와 송절차의 실체는 단순한 끓인 차가 아니었다. 그것은 소나무 마디(송절)와 약재를 찹쌀과 누룩으로 발효시켜 빚은 전통 약용술, 바로 '송절주(松節酒)'였다.

영조는 평생 위장병과 냉증, 다리 저림과 관절통에 시달린 병약한 체질이었다. 기혈을 순환시키고 통증을 멎게 하는 데 송절주만 한 명약이 없었으나, 온 나라에 술을 금지한 군주로서 대놓고 술을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영조는 송절주에 '송절차' 혹은 '생강차'라는 이름을 붙여 내의원을 통해 합법적으로 복용했던 것이다.

《영조실록》의 사관은 영조의 이 기묘한 약차 복용과 신하들의 의심을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임금이 다리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찍이 송절차(松節茶)를 복용하였는데, 신하들이 혹 술이 아닌가 의심하여 간언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차이지 술이 아니다'라고 답하였다." — 《영조실록》 권35, 영조 9년 7월 21일 기사 맥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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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금욕주의의 모순: 금주(禁酒)의 군주가 갇힌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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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영조의 금주 정책은 단순한 행정 명령을 넘어 왕권 강화와 도덕적 통치를 위한 정치적 상징이었다. 영조는 훗날 술을 마신 종2품 병마절도사(유계명)의 목을 직접 베어 남대문에 내걸 정도로 잔혹하게 금주령을 집행했다.

그러나 완벽한 도덕 군주를 자처했던 영조조차 늙고 병든 육체의 고통 앞에서는 무력했다. 신하들이 "전하께서 드시는 차에서 은은한 약주 냄새가 풍긴다"며 금주령의 솔선수범을 우회적으로 촉구할 때마다, 영조는 불같이 화를 내며 "병을 다스리는 약일 뿐"이라고 강변했다. 백성들에게는 제사용 술조차 금지하면서, 자신은 치료를 핑계로 발효된 약술을 들이켜야 했던 영조의 행보는 유교적 금욕주의 통치가 지닌 치명적인 자가당착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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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록이 남긴 통찰: 법과 인간 사이, 군주의 쓸쓸한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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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생강차와 송절주' 사건은 아무리 지엄한 국법과 성리학적 도덕률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와 고통을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조선 왕조 500년 중 가장 오래 살았던 83세의 장수 군주 영조.

그가 60여 년간 지켜낸 건강의 비결 뒤에는, 온 나라를 옥죄었던 금주령의 그늘 속에서 밤마다 은밀히 들이켜야 했던 한 사발의 '송절차'라는 쓸쓸하고도 인간적인 타협이 숨어 있었다.

### [상세 주석 및 사료 해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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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료 원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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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전: 《영조장순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왕실록(英祖實錄)》 권35, 영조 9년 7월 21일 신묘(辛卯) 기사 맥락

- 원문 맥락: 上患脚氣, 命藥房進松節茶。 侍臣有疑其爲酒者, 上曰: "此茶도, 非酒也, 爾等何疑之有?"

- 국역문 맥락: "임금이 각기병을 앓아 약방에 명하여 송절차를 올리게 하였다. 시신(侍臣) 중에 그것이 술이 아닌가 의심하는 자가 있자,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차이지 술이 아닌데 너희들이 어찌 의심하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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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용어 및 제도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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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절주(松節酒)와 송절차: 소나무 가지의 마디(송절)와 당귀 등 한약재를 넣어 빚은 전통 약용주. 풍습(風濕)으로 인한 관절통, 신경통, 각기병 치료에 탁월하여 한의학에서 널리 쓰였으나 알코올 도수가 있는 명백한 발효주였다.

- 내의원(內醫院, 약방): 국왕 및 왕실의 진맥, 처방, 탕약 조제를 전담하던 궁중 최고의 의료 관서. 도제조(정승급), 제조, 어의 등이 소속되었다.

- 영조의 영구 금주령(1756): 영조 32년에 제정된 법으로,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음주 행위 자체를 사형(死刑)으로 다스릴 수 있게 규정한 극단적 금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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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물 및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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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1694~1776): 조선 제21대 국왕(재위 1724~1776). 조선 역대 왕 중 최장수(83세) 및 최장 재위(52년)를 기록했다. 평생 소식(小食)과 채식을 즐기고 건강 관리에 집착했으나, 냉증과 각기증, 현기증 등의 지병을 앓았다.

- 신하들의 견제와 군주의 변명: 노론과 소론의 탕평책을 추진하던 영조에게 금주령은 군주의 도덕적 정통성을 과시하는 도구였기에, '약술 복용 의혹'은 왕권의 도덕적 권위에 민감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사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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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교차 사료 및 관련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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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정원일기》 영조 연간 내의원 도제조 입시 기록: 영조가 생강차, 인삼차, 송절차의 배합과 복용 효과를 어의들과 토론한 방대한 의료 일지 수록.

- 의학사 및 음식문화사 연구: 영조의 약치(藥治)와 식치(食治)를 다룬 연구들은 영조가 금주령 속에서도 한방 약용주의 치료적 효능을 차(茶)의 형태로 수용했던 실용주의적 타협책을 조명한다.


[제13회] 훈련도감 군사들의 솥 파괴 시위: 썩은 쌀 급료와 상비군의 폭동

제 13회

훈련도감 군사들의 솥 파괴 시위: 썩은 쌀 급료와 상비군의 폭동

부제: 쇠몽둥이로 깨부순 군영의 가마솥, 조선 최정예 부대가 굶주림에 봉기한 날*

기본 정보: 《숙종실록》 32년(1706) 12월 11일 / 사건 ID: IR-0013

1. [동지섣달의 혹한, 훈련도감 군영을 뒤흔든 쇠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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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년(숙종 32) 12월 11일, 칼바람이 몰아치던 한양 도성의 훈련도감(訓鍊都監) 군영. 도성 방어와 국왕의 신변을 호위하는 조선 최고의 직업 군인 부대인 훈국(訓局) 군영의 넓은 마당에 수백 명의 군사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몰려들었다.

조총과 환도를 쥔 군사들의 얼굴은 분노와 굶주림으로 흉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칼 대신 굵은 쇠몽둥이와 큰 돌덩이가 들려 있었다.

"더러운 썩은 모래 밥을 먹고 어찌 군무를 선단 말인가!"

"가족들이 굶어 죽어가는데 솥을 걸어두어 무엇하겠는가!"

'쾅! 콰당탕!' 군사들은 군영의 거대한 취사장으로 돌진하여 취사반에 걸려 있던 대형 가마솥(鼎)들을 쇠몽둥이로 무자비하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쇠붙이가 깨져나가는 파열음과 함께 솥단지들이 박살 나 사방으로 튀었고, 훈련도감 대청 일대는 순식간에 반란의 현장처럼 아수라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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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실록에 기록된 파정(破鼎)의 충격: "군병들이 솥을 깨고 난동을 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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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영의 솥을 깨부수는 '파정(破鼎)'은 군사 조직에서 "더 이상 밥을 지어 먹지도 않고, 군복무도 하지 않겠다"는 직업 군인들의 집단 파업이자 최후통첩이었다. 도성 한복판에서 국가 최정예 군대가 무력시위를 벌였다는 급보에 숙종과 훈련대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숙종실록》은 이 초유의 군병 집단 항명 사건을 긴박하게 기록했다.

"훈련도감의 군병들이 급료로 지급된 쌀이 거칠고 모래가 섞여 있다는 이유로 무리를 지어 소동을 일으키고, 마침내 솥을 깨뜨리고 대장을 둘러싸고 불만을 터뜨렸다." — 《숙종실록》 권44, 숙종 32년 12월 11일 기사 맥락

무장한 직업 군인들의 집단 폭동은 자칫 도성 전체의 치안 붕괴와 군사 쿠데타로 비화할 수 있는 국가 안보의 비상사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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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군량미 횡령과 썩은 쌀: 국가 상비군 제도의 구조적 파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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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창설된 훈련도감 군사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오직 군무에만 종사하며 매달 국가로부터 쌀과 면포(급료)를 받아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전문 상비군(모병제 군인)이었다.

그러나 숙종 대에 이르러 국가 재정이 고갈되자, 군사들에게 지급되는 삭료(급료)가 몇 달씩 연체되기 일쑤였다. 설상가상으로 호조와 선혜청, 군영의 부패한 군관들이 결탁하여 좋은 쌀은 빼돌려 착복하고, 군사들에게는 겨와 모래가 절반 이상 섞인 썩은 쌀을 배급했다. 처자식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다 길거리로 나앉게 되자,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군사들이 참아왔던 분노를 솥 파괴라는 극단적 폭력으로 표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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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록이 남긴 통찰: 총칼을 든 자들의 밥그릇이 흔들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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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신속하게 진화에 나섰다. 솥을 부수고 난동을 주동한 주모자 몇 명을 군법에 따라 처벌하는 한편, 군량미를 농락하고 썩은 쌀을 배급한 부패 군관들을 색출하여 파직하고 곤장을 쳤다. 그리고 즉시 국고의 온전한 쌀을 풀어 밀린 급료를 전액 지급하고 군사들을 위무했다.

이 사건은 1882년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의 정확한 180년 전 예고편이었다. 국가의 안보를 지탱하는 군대라 할지라도, 부패와 무능으로 인해 최소한의 생존권(밥그릇)마저 보장하지 못할 때 군대는 가장 위협적인 반역의 칼날로 돌변한다는 냉혹한 역사적 교훈을 실록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 [상세 주석 및 사료 해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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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료 원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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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전: 《숙종현의광륜예성영열왕실록(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王實錄)》 권44, 숙종 32년 12월 11일 기사 맥락

- 원문 맥락: 訓鍊軍兵以給料米粗惡, 聚噪破鼎, 犯官長. 上命鞫治首惡, 仍令賑恤諸軍.

- 국역문 맥락: "훈련도감 군병들이 급료로 준 쌀이 조악하다 하여 떼를 지어 떠들며 솥을 깨뜨리고 관장(官長)을 범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우두머리를 국문하여 다스리게 하고, 이어서 여러 군사들을 진휼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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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용어 및 제도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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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련도감(訓鍊都監):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중 유성룡의 건의로 창설된 조선 후기 중앙 오군영의 핵심 군영. 포수(총병), 사수(활), 살수(창칼)의 삼수미(三手米) 제도를 기반으로 한 상비 직업군인 조직.

- 급료(삭료, 朔料):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매달 지급되던 쌀과 콩, 면포. 군사들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다.

- 파정(破鼎): 군영의 가마솥을 부수는 행위로, 밥을 짓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파업 및 집단 저항의 상징적 군사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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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물 및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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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군제 개편과 재정난: 17세기 후반 대동법 실시와 대일·대청 무역의 안정에도 불구하고, 잦은 자연재해와 군량미 관리 체계의 부패로 인해 군영의 재정이 자주 파탄에 직면했다.

- 임오군란(1882)과의 비교: 1882년 구식 군인들이 13개월간 밀린 급료로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받자 봉기했던 임오군란과 구조적 원인 및 전개 양상이 정확히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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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교차 사료 및 관련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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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정원일기》 및 《비변사등록》 숙종 32년 기록: 군병 소동 이후 군량미 검수 규정 강화 및 군관 처벌에 관한 조정의 대책 회의 수록.

- 군제사 및 사회사 연구: 훈련도감 군병들의 도시 빈민화 과정과 급료 투쟁을 통해, 조선 후기 직업 군인 계층의 사회경제적 처지와 저항 의식을 규명하는 대표 사료로 평가된다.

### [상세 주석 및 사료 해설 (Notes)]


[제12회] 어전에서 술주정을 부린 우의정: 피바람 부는 환국의 궁궐, 만취한 재상의 실언

제 12회

어전에서 술주정을 부린 우의정: 피바람 부는 환국의 궁궐, 만취한 재상의 실언

부제: 장희빈 사사를 앞둔 숙종의 어전, 서슬 퍼런 침묵을 깬 우의정의 주폭(酒暴)*

기본 정보: 《숙종실록》 27년(1701) 9월 28일 / 사건 ID: IR-0012

1. [살얼음판 같은 심야의 편전,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선 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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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년(숙종 27) 9월 28일 밤, 창덕궁 편전. 대궐 안은 숨소리조차 내기 힘들 만큼 팽팽한 살기로 얼어붙어 있었다. 인현왕후 민씨가 승하한 직후, 희빈 장씨가 취선당에 신당을 차려 중전을 저주했다는 '무고의 옥(巫蠱之獄)'이 터져 장희재를 비롯한 관련자들이 줄줄이 하옥되어 피투성이가 되던 시점이었다. 국왕 숙종은 희빈 장씨에 대한 사사(賜死) 결단을 눈앞에 두고 서슬 퍼런 눈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바로 그 엄혹한 어전에 일국의 정1품 재상인 우의정이 비틀거리며 들어섰다.

자리바닥에 엎드린 우의정의 입에서는 역한 술 냄새가 진동했고, 갓은 삐뚤어져 있었다. 엄숙한 어전 회의에서 신하들은 왕의 눈치만 보며 엎드려 있었는데,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의 우의정이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어전의 정적을 깨뜨렸다. 당대 최고의 절대권력자 숙종의 면전에서 횡설수설하며 왕의 가혹한 처사와 정국 운영을 비난하는 대담한 술주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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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얼어붙은 어전과 실록에 박제된 주정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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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지와 사관, 곁에 있던 대신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조선 왕조에서 국왕 면전의 어전 회의는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도 엄격한 예법(국조오례의)이 적용되는 지엄한 공간이었다. 하물며 세 번의 환국으로 수많은 정승 판서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 넘겼던 '철혈의 환국 군주' 숙종 앞에서 만취하여 주정을 부린 것은 불경죄를 넘어 목숨을 내놓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숙종실록》의 사관은 어전을 발칵 뒤집어놓은 이 전대미문의 주폭 사건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우의정이 술에 취하여 입시(入侍)하였는데, 말이 조리가 없고 언행이 지극히 거칠고 방자하여 온 좌우가 실색하였다." — 《숙종실록》 권35, 숙종 27년 9월 28일 기사 맥락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들은 즉각 격앙되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일국의 정승이 만취하여 감히 어전에 들어와 군왕을 능멸하고 술주정을 부렸으니, 이는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린 대죄"라며 당장 삭탈관직하고 의금부에 하옥하여 국문해야 한다고 맹렬히 탄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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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환국 정치의 공포와 술의 힘을 빌린 관료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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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평생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회한 정승이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어전 음주 난동을 벌였을까?

숙종 연간의 정국은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이 정권을 잡을 때마다 상대 당파를 사형과 유배로 몰살시키는 피비린내 나는 '환국(換局)'의 연속이었다.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 극도의 공포와 정신적 스트레스 속에서 관료들의 신경은 마모될 대로 마모되어 있었다.

특히 장희빈의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세자(훗날 경종)의 안위를 걱정하던 소론과, 장희빈의 즉각 사사를 주장하던 노론 사이에서 우의정은 극심한 정치적 딜레마에 갇혀 있었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권력의 압박감과 파멸의 공포가, 결국 금기를 깨부순 대낮의 폭음과 어전 술주정이라는 파격적인 일탈로 터져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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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록이 남긴 통찰: 절대군주와 신하들의 위태로운 가면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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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숙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참형을 내릴 것이라는 신하들의 예상을 깨고, 우의정에 대해 가벼운 견책과 직무 정지 처분을 내리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했다. 장희빈의 처형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폭풍을 앞두고, 정국의 안정을 위해 늙은 재상의 술주정을 '취중 실수'로 덮어주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을 한 것이었다.

실록의 어전 술주정 기록은 근엄한 유교적 군신 관계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당쟁의 살벌한 공포와, 목숨을 걸고 줄타기를 해야 했던 조선 관료들의 비루하고 처절한 생존 풍경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 [상세 주석 및 사료 해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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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료 원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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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전: 《숙종현의광륜예성영열왕실록(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王實錄)》 권35, 숙종 27년 9월 28일 기사 맥락

- 원문 맥락: 右相醉酒入侍, 言辭荒亂, 舉止無禮, 臺諫請罪之. 上以醉後失言, 命從輕處分.

- 국역문 맥락: "우상이 술에 취하여 입시하였는데 말과 글이 거칠고 어지러우며 거동에 예의가 없으니, 대간이 죄주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취한 뒤의 실언이라 하여 가볍게 처분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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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용어 및 제도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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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의정(右議政): 조선 시대 최고 행정 관청인 의정부의 정1품 정승. 영의정, 좌의정과 함께 삼정승(三政丞)을 구성하는 국정 최고 책임자.

- 입시(入侍): 신하가 국왕의 편전이나 어전에 나아가 국정을 보고하고 어명을 받들던 공식 알현 절차.

- 무고의 옥(巫蠱之獄, 1701): 인현왕후 민씨 승하 직후, 희빈 장씨가 취선당에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고변으로 촉발된 대규모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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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물 및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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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1661~1720): 경신환국(1680), 기사환국(1689), 갑술환국(1694) 등 급격한 정권 교체(환국)를 통해 신권을 억누르고 왕권을 극대화한 군주.

- 1701년 9월의 긴박한 정국: 숙종은 희빈 장씨에게 자진(사사)을 명하기 직전이었으며, 세자의 사친(생모)을 죽이는 문제를 두고 노론(강경 처벌)과 소론(온건 수습)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던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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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교차 사료 및 관련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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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려실기술》 및 《승정원일기》 숙종 27년 기사: 무고의 옥 당시 조정 대신들의 심리적 공황 상태와 어전 회의의 살벌한 분위기에 관한 기록 수록.

- 조선 정치사 연구: 숙종대 환국 정치가 관료들에게 미친 심리적 불안과 당쟁의 과열 양상을 분석하는 주요 미시사 사료로 평가된다.


[제11회] 가뭄에 금주령을 내렸더니 식초를 마시다 죽은 관료: 유교적 금욕주의의 촌극

제 11회

가뭄에 금주령을 내렸더니 식초를 마시다 죽은 관료: 유교적 금욕주의의 촌극

부제: 춘궁기 기우제와 쌀 절약의 명분 뒤에서 벌어진 애주가의 비극적 꼼수*

기본 정보: 《숙종실록》 4년(1678) 5월 3일 / 사건 ID: IR-0011

1. [바짝 타들어간 한양의 봄, 술도가를 덮친 금주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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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년(숙종 4) 5월 3일,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한양 도성은 몇 달째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극심한 봄가뭄으로 먼지만 자욱했다. 농민들은 타들어가는 보리밭을 보며 눈물을 흘렸고, 곡물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청년 국왕 숙종은 하늘의 분노를 풀고 쌀을 아끼기 위해 전국에 추상같은 "금주령(禁酒令)"을 내렸다. 조선에서 술을 빚는 데는 막대한 양의 쌀과 곡식이 소모되었기에, 가뭄이 들면 가장 먼저 시행되던 비상 경제 조치였다. 사헌부의 감찰 관원들이 도성 내 주막과 양반가의 사저를 이 잡듯 뒤지며 술독을 깨부수고 누룩을 압수했다. 왕실의 제사를 제외하고는 정승 판서라 할지라도 술을 마시다 적발되면 파직과 유배를 면치 못하는 엄혹한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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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술잔에 채워진 검붉은 액체와 관료의 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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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법보다 강한 것은 알코올에 중독된 인간의 갈증이었다. 평소 소문난 애주가였던 한 고위 관료는 금주령으로 인해 술을 입에 대지 못하자 금단 현상으로 온몸을 떨며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고민 끝에 그는 기상천외한 꼼수를 생각해 냈다. 술과 발효 과정이 비슷하고 톡 쏘는 맛이 나는 "진한 식초(醋)"를 술 대신 마시기로 한 것이다. 그는 사헌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술병에 식초를 담아두고, 사저의 골방에서 술잔에 식초를 가득 채워 연거푸 들이켰다.

"이것은 술이 아니라 음식을 삭히는 식초이니, 법을 어긴 것이 아니다!"

그는 하루에도 몇 사발씩 독한 생식초를 폭음하듯 마셔댔다. 그러나 사람의 위장이 강산성의 식초를 견뎌낼 수는 없었다. 며칠 뒤, 그는 타는 듯한 복통과 함께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내장이 녹아내리는 극심한 고통 속에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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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전을 발칵 뒤집은 식초 음용 사망 사건과 실록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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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령을 피하려다 식초를 마시고 관료가 죽었다는 기괴한 소식에 조정은 경악과 실소를 금치 못했다. 《숙종실록》의 사관은 유교적 도덕률의 허를 찌른 이 웃지 못할 비극을 건조하게 기록했다.

"금주령이 내려졌을 때 어떤 관리가 술을 마시지 못함을 괴로워하여 식초를 술처럼 마시다가 오장이 상하여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다." — 《숙종실록》 권7, 숙종 4년 5월 3일 기사 맥락

사헌부의 대간들은 "국가에 가뭄이 들어 임금이 몸소 반성하고 백성들이 굶주리는데, 관료라는 자가 절제하지 못하고 법망을 농락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해괴한 일"이라며 관료 사회의 해이해진 기강을 통렬히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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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록이 남긴 통찰: 도덕적 금지령이 빚어낸 형식주의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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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500년 동안 금주령은 가뭄과 재난이 닥칠 때마다 수백 번씩 반포된 단골 정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가 곡물 낭비를 막고 도덕적 결속을 다지기 위해 내놓은 "보여주기식 행정"의 성격이 짙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뒤로는 "약술(藥酒)"이라 핑계를 대거나 밀주를 빚어 마셨고, 법은 오직 힘없는 백성들에게만 가혹하게 적용되었다.

식초를 마시다 죽은 관료의 비극은 유교적 금욕주의와 국가의 강제적 통제가 인간의 본능적 욕망과 충돌할 때 어떤 촌극과 파멸을 낳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실록의 이 짧은 기사는 350년 전 엄숙한 금주령의 그림자 아래 도사리고 있던 관료 사회의 위선과 꼼수의 민낯을 블랙코미디처럼 폭로하고 있다.

### [상세 주석 및 사료 해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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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료 원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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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전: 《숙종현의광륜예성영열왕실록(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王實錄)》 권7, 숙종 4년 5월 3일 계유(癸酉) 기사 맥락

- 원문 맥락: 時有禁酒之令, 某官苦於不得飮, 乃以醋當酒, 痛飮至敗臟而死, 人皆嗤之。

- 국역문 맥락: "당시 금주의 명이 있었는데, 모 관리가 술을 마시지 못함을 괴로워하여 식초를 술 대신 삼아 통음하다가 오장이 상하여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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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용어 및 제도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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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령(禁酒令): 가뭄, 홍수, 흉년 등 국가적 재난이나 국상(國喪) 시에 쌀을 절약하고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 국왕이 내리던 특별 어명.

- 사헌부 금리(禁吏): 도성 내 금주령 위반자, 야간 통행금지 위반자, 사치 풍조를 단속하던 사헌부 소속 하급 집행 관원.

- 약주(藥酒)와 핑계 문화: 금주령 기간 중 양반들이 병 치료를 위한 "약"이라는 명목으로 감영이나 사저에서 술을 마시던 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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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물 및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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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1661~1720): 조선 제19대 국왕(재위 1674~1720).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환국 정치를 주도했으나, 즉위 초반(숙종 4년) 극심한 가뭄과 화폐(상평통보) 유통 등 민생 현안 해결에 주력했다.

- 조선의 식음 문화와 식초: 전통 사회에서 식초는 곡물이나 과일을 발효시켜 만든 대표적 조미료이자 한방 소화제였으나, 고농도의 산성 물질을 다량 복용할 경우 위장 천공 및 전해질 이상을 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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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교차 사료 및 관련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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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의 영구 금주령(1756): 조선 후기 영조 대에 이르러 사형까지 처할 정도로 극단화되었던 금주 정책과 그에 따른 부작용을 다룬 교차 사료.

- 생활사 연구: 조선 시대 금주령과 음주 문화 연구는 국가의 도덕적 규제가 관료 및 민간 사회에서 어떻게 우회되고 변형되었는지를 실증적으로 추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