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24일 월요일

제49회 중명전에서 강요된 을사늑약과 외교권 박탈 1905년 11월 17일, 어둠에 잠긴 제국의 비명

제49회

중명전에서 강요된 을사늑약과 외교권 박탈: 1905년 11월 17일, 어둠에 잠긴 제국의 비명

부제: 덕수궁을 포위한 일본군 총칼, 참정대신 한규설의 절규와 을사오적(乙巳五賊)의 매국
기본 정보: 《고종실록》 42년(1905) 11월 17일 / 사건 ID: IR-0049
1. [총칼로 에워싸인 중명전, 황실을 옥죈 죽음의 침묵]
1905년(광무 9) 11월 17일 늦은 밤, 서울 덕수궁 중명전(重溟殿). 황제의 서재이자 편전이었던 2층 붉은 벽돌 건물 안팎은 서슬 퍼런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미국(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영국(제2차 영일동맹)으로부터 조선 지배를 묵인받은 일본 제국의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이끄는 일본 헌병과 군대가 중명전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어전 회의장 안으로 군홧발을 디디며 들어선 이토는 서류 한 장을 들이밀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일본의 통감부를 설치한다는 망국의 조약안이었다.
2. [실록에 기록된 통한의 밤: 한규설의 감금과 오적의 배신]
고종 황제는 "짐이 목숨을 잃을지언정 결코 조약에 서명할 수 없다"며 끝까지 입궐을 거부하고 다른 방에 머물렀다.회의를 주재하던 참정대신(총리) 한규설(韓圭卨)이 벌떡 일어나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이 조약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다! 내가 목이 잘릴지언정 결단코 찬성할 수 없다!"이토 히로부미가 눈짓을 하자 일본 헌병들이 달려들어 한규설의 멱살을 잡고 중명전 마루 끝 골방으로 끌고 가 강제로 감금해 버렸다.반대파 수장이 사라진 회의실에서 이토는 대신들을 한 사람씩 지목하며 찬반을 다그쳤다. 이때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이 앞장서며 매국의 물꼬를 텄다."일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으니 자구를 수정하여 응하는 것이 가합니다."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그리고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이 잇따라 찬성표를 던졌다. 후세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름, '을사오적(乙巳五賊)'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11월 18일 새벽 2시, 박제순과 하야시가 조약문에 날인했다. 황제의 인준도, 정식 조약 제목도 없는 날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제로 성립된 것이었다.《고종실록》의 기록관은 나라의 숨통이 끊어진 이 치욕의 날을 기록했다.*"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외부대신 박제순과 중명전에서 5개 조항의 협약을 조인하니, 외교에 관한 사항을 일본 통감부로 넘기게 되었다." — 《고종실록》 권46, 고종 42년 11월 17일 및 18일 기사 맥락*
3. [시일야방성대곡과 민족의 피눈물]
조약 소식이 전해지자 온 나라가 통곡과 분노로 뒤흔들렸다.황성신문 사장 장지연(張志淵)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 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이라는 피 끓는 논설을 발표하여 을사오적의 반역을 만천하에 고발했다.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과 원로대신 조병세는 2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결사 순국 자결했으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최익현, 신돌석, 민종식 등이 이끄는 '을사의병(乙巳義兵)'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4. [기록이 남긴 통찰: 국새 없는 늑약의 무효와 헤이그의 절규]
고종 황제는 각국 원수들에게 "짐은 결코 을사조약에 찬성하지 않았고 국새를 찍지도 않았다. 이 조약은 원천 무효다"라는 친서를 보내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특사를 파견하여 주권 회복을 호소했다.실록에 새겨진 1905년 11월 17일 중명전의 밤은, 제국주의 폭력과 매국노들의 야합으로 주권을 잃어버린 망국의 비통한 기록이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피 흘린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저항의 출발점이다. [상세 주석 및 사료 해설 (Notes)]#
1. [사료 원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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