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23일 일요일

[제15회] 시험지에 답 대신 임금 욕설을 쓴 응시생: 영조를 경악시킨 과거장의 대역죄

제 15회

시험지에 답 대신 임금 욕설을 쓴 응시생: 영조를 경악시킨 과거장의 대역죄

부제: 사도세자 참사 직후, 붉은 답안지(시권)에 쏟아낸 낙방 선비의 저주와 파문

기본 정보: 《영조실록》 39년(1763) 10월 9일 / 사건 ID: IR-0015

1. [과거 시험장의 채점실, 붓을 떨어뜨린 시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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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년(영조 39) 10월 9일, 한양 궁궐에서 열린 특별 과거 시험(정시)의 채점소. 수천 명의 유생들이 제출한 두루마리 답안지(시권, 試券)를 촛불 아래서 채점하던 시관(시험관)들의 손이 일순간 얼어붙었다.

한 응시생이 제출한 답안지를 펼쳐 든 고시관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쥐고 있던 붉은 붓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시권에 적힌 글은 사서삼경의 주석이나 나라의 정책을 논하는 대책문(對策文)이 아니었다. 국왕 영조의 출신(무수리의 소생)에 대한 천대와, 노론 척신 가문의 탐욕, 그리고 군주를 향한 입에 담지 못할 원색적인 욕설과 저주가 먹물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덕을 잃고 친아들(사도세자)을 뒤주에 가둬 굶겨 죽였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나라이며 천벌을 어찌 피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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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전을 뒤흔든 대역죄와 실록에 박제된 흉서(凶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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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시험 답안지는 단순한 시험지가 아니라, 국왕에게 직접 바치는 공문서였다. 그 신성한 텍스트에 군주를 능멸하는 욕설과 흉언(凶言)을 적어 제출했다는 것은 국왕의 면전에 칼을 들이댄 대역모(大逆謀) 사건이었다.

채점관들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답안지를 들고 대전으로 달려가 영조에게 바쳤다. 답안지를 읽어 내려가던 영조의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고, 어전은 벼락이 떨어진 듯한 침묵에 휩싸였다.

《영조실록》의 기록관은 과거장을 발칵 뒤집어놓은 이 충격적인 사건을 엄중하게 기록했다.

"과거의 시권(試券) 가운데 임금을 비방하고 능멸하는 흉악한 글을 지어 올린 자가 있어, 상이 크게 노하여 즉시 피봉을 뜯어 성명을 확인하고 의금부에 하옥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 《영조실록》 권102, 영조 39년 10월 9일 기사 맥락

영조는 즉시 과거 시험장 문을 봉쇄하고, 답안지 윗부분의 피봉(성명과 본관을 가려둔 봉인)을 찢어 응시생의 신원을 확인한 뒤 금부도사를 급파하여 해당 선비를 체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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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임오화변(사도세자의 죽음)의 트라우마와 억눌린 지식인의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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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유교 국가의 선비가 삼족이 멸할 대역죄를 각오하고 과거 시험지에 임금 욕설을 썼을까?

사건이 일어난 1763년은 바로 전해인 1762년, 영조가 친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8일 만에 굶겨 죽인 끔찍한 '임오화변(壬午禍變)'의 충격과 유혈이 채 가시지 않은 해였다. 왕실 내부의 비극과 노론 척신들의 권력 독점, 그리고 탕평책의 허울 아래 소외된 남인과 소론, 지방 유생들의 분노와 허탈감은 임계점에 달해 있었다.

더욱이 과거 시험은 이미 권문세도가들의 대리 시험과 뇌물로 썩을 대로 썩어, 빽 없는 지방 선비들에게는 합격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가문의 명운도, 국가의 도덕도 모두 무너져 내렸다고 판단한 한 절망적인 지식인이, 자신의 목숨을 던져 국왕의 위선과 폭정을 고발하는 가장 극단적인 테러 수단으로 '과거 답안지'를 선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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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록이 남긴 통찰: 붓으로 던진 가장 절망적인 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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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선비는 의금부의 혹독한 고문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다가 참형에 처해졌다. 영조는 과거 시험장의 검색을 강화하고 불온한 사상을 가진 유생들을 색출하도록 명했으나, 답안지에 남겨진 분노의 먹물 자국은 영조의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았다.

실록의 '시권 흉언 사건'은 화려한 영조의 탕평 정국 이면에 흐르고 있던 사대부 지식인들의 깊은 환멸과 분노를 웅변한다. 충성의 언어로 가득 차야 할 과거 시험장에 투척된 저주의 문장들은, 닫힌 사회에서 출구를 잃은 지식인의 절망이 최고 권력을 향해 던진 가장 처절한 항의의 외침이었다.

### [상세 주석 및 사료 해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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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료 원문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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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전: 《영조장순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왕실록(英祖實錄)》 권102, 영조 39년 10월 9일 계유(癸酉) 기사 맥락

- 원문 맥락: 庭試試券中, 有凶言悖說, 斥辱乘輿。 上震怒, 命開其封, 逮其人鞫之, 痛繩以大逆。

- 국역문 맥락: "정시의 시험 답안지 중에 흉악한 말과 패역한 주장이 있어 임금을 모욕하고 배척하였다. 상이 몹시 노하여 그 봉인을 열고 그 사람을 체포하여 국문하게 하고, 대역죄로 엄히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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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용어 및 제도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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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권(試券)과 피봉(皮封): 과거 시험 답안지를 시권이라 하며, 채점의 공정성을 위해 응시자의 성명, 본관, 4조(부·조·증조·외조)를 적은 부분을 종이로 접어 봉인하는 것을 피봉 혹은 미봉(彌封)이라 했다.

- 정시(庭試): 국가의 경사나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 대궐 뜰(정원)에서 치르던 특별 문·무과 과거 시험.

- 대역죄(大逆죄): 국왕이나 왕실을 모독하거나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한 죄로, 삼족을 멸하고 본인은 능지처참에 처해지던 최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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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물 및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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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오화변(1762) 직후의 정국: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비극적으로 사망한 지 불과 1년여 뒤로, 영조의 죄책감과 신경과민, 세자파(소론)와 척신파(노론) 간의 극단적인 암투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

- 조선 후기 과거 제도의 붕괴: 문벌 귀족화와 합격증 매매, 부정행위 만연으로 인해 지방 유생과 소외 계층의 불만이 극에 달해 시험지나 괘서(벽서)를 통한 저항이 빈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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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교차 사료 및 관련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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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55년(영조 31) 나주괘서 사건 및 심정연 시권 사건(을해옥사): 과거 시험지에 정권과 군주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대규모 옥사로 비화한 교차 사료.

- 사상사 및 저항사 연구: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과거장 저항을 다룬 연구들은 시권 흉언 사건을 단순한 광인의 일탈이 아니라, 억압된 체제에 맞선 지식인의 자살적 항거로 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