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 죽음의 신 (사신 대부)
열두 명의 아이를 둔 가난한 남자가 열세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찢어지는 가난에 절망하여 큰길로 뛰어나가 처음 마주치는 자를 대부로 삼기로 결심했습니다.
첫 번째로 하느님(우리 주님)이 나타나 아이를 돌보아주겠노라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거절했습니다.
"당신은 부자에게는 넘치게 주면서 가난한 자는 굶주리게 방치하니, 공평하지 못한 당신을 대부로 모시지 않겠소."
두 번째로 악마가 나타나 황금을 주겠노라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거절했습니다.
"당신은 인간을 속이고 지옥으로 끌고 가 파멸시키니 대부로 삼을 수 없소."
세 번째로 앙상한 뼈마디의 사신(죽음의 신/Der Tod)이 다가와 말했습니다.
"나를 대부로 삼아라. 나는 가난한 자나 부자나, 황제나 거지나 차별 없이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거두는 공평한 존재이니라."
남자는 "그대야말로 참으로 정의롭다"며 사신을 열세 번째 아이의 대부로 맞이했습니다.
치유의 약초와 천하제일 명의의 등극
아이가 자라 청년이 되자, 사신 대부가 나타나 청년을 깊은 숲속으로 데려가 신비한 치유의 약초(Heilkraut) 한 줌을 쥐여주었습니다.
"내가 환자의 머리맡에 서 있거든 이 약초를 달여 먹여라. 환자는 즉시 살아나리라. 그러나 내가 환자의 발치에 서 있거든 그는 내 것이니 어떤 약초도 쓰지 말라. 만일 내 뜻을 거스른다면 네 목숨을 거두어가리라."
청년은 세상의 모든 불치병을 고치는 위대한 명의가 되어 막대한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두 번의 배신과 회전하는 침대
어느 날 늙은 국왕이 불치병에 걸려 청년을 불렀습니다.
침실로 들어선 청년은 사신이 국왕의 발치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막대한 황금과 명예에 눈이 먼 청년은 사신을 속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청년은 신하들을 시켜 국왕의 침대를 180도 돌려, 사신이 머리맡에 서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약초를 먹여 왕을 살려냈습니다.
사신이 뼈마디를 부딪치며 분노하여 경고했습니다.
"내 너를 대부의 정으로 한 번은 용서하겠으나, 다시 한번 나를 속였다간 네 숨통을 끊어놓으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눈부시게 아름다운 공주가 병에 걸렸습니다. 국왕은 공주를 살리는 자에게 공주와의 혼인과 왕위를 물려주겠노라 선언했습니다.
공주의 미모에 넋이 나간 청년은 사신이 다시 공주의 발치에 서 있는 것을 보았음에도, 경고를 무시하고 공주의 침대를 거꾸로 돌려버렸습니다.
약초를 먹은 공주는 기적처럼 살아났으나, 사신의 시커먼 분노는 임계점에 달했습니다.
꺼져가는 생명의 촛불과 지하 동굴의 최후
사신은 청년의 멱살을 쥐고 깊은 땅속 지하 동굴로 끌고 내려갔습니다.
그곳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끝없이 펼쳐진 수억 개의 생명의 촛불(Lebenslichter)들이 깜빡이고 있었습니다. 큰 촛불, 중간 촛불, 그리고 거의 다 타들어 간 작은 촛막대들이 흔들렸습니다.
사신이 가리킨 청년의 촛불은 기름이 바닥나 금방이라도 꺼질 듯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작은 촛토막이었습니다.
공포에 질린 청년이 사신의 발밑에 엎드려 피눈물을 흘리며 애원했습니다.
"대부님,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 새 촛불에 불을 옮겨 붙여주세요! 왕비와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십시오!"
사신은 소원을 들어줄 듯 자비로운 표정을 지으며 커다란 새 촛불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신은 청년의 배신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불을 옮겨 붙이려는 척하던 사신은, 복수심에 차 고의로 손을 삐끗하여 다 타버린 청년의 작은 촛불을 바닥으로 떨어뜨려 꺼버렸습니다.
치익.
마지막 불꽃이 어둠 속으로 꺼지는 그 찰나, 청년은 바닥으로 고꾸라져 숨을 거두었고 영원히 사신의 차가운 손아귀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 깊이 읽기: 심층 주석 및 문학·민속학적 해설
[주석 1] 죽음의 평등주의(Egalitarianism of Death)와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 하느님과 악마를 거부하고 사신을 대부로 택하는 도입부는, 봉건 계급의 불평등에 시달리던 민중이 '만인에게 공평한 유일한 정의'로서 죽음을 숭배했던 중세 흑사병 시대의 세계관을 대변합니다.
[주석 2] 생명의 촛불(Lebenskerzen)의 도상학: 인간의 수명을 촛불의 길이에 비유하는 모티프는 고대 그리스 운명의 여신 모이라(Moirai)의 실타래 신화와 일치합니다. 지하 동굴의 수억 개 촛불은 인간 존재의 덧없음과 유한성을 시각화한 압도적인 문학적 상징입니다.
[주석 3] 인간의 오만(Hubris)과 죽음의 기만: 사신과의 계약을 어기고 침대를 돌려 자연의 법칙을 왜곡하려 한 청년의 최후는, 과학과 의술로도 결코 정복할 수 없는 필멸성(Mortality)의 엄숙한 승리를 보여줍니다.
스토리 요약 / 생각거리
빈부귀천 없이 공평한 사신을 대부로 모셔 명의가 되었던 청년이, 탐욕과 사랑에 눈이 멀어 죽음의 법칙을 두 번 속였다가 지하 동굴에서 자신의 생명 촛불이 꺼지며 파멸하는 웅장하고 서늘한 고전 비극의 걸작입니다.
※ 본 포스팅은 순화되기 전의 고전 원전 및 민담 전승을 바탕으로 번역·재구성한 이야기로, 다소 기괴하거나 서늘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