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31일 월요일

제3편 이혼을 허락할 수 없다

제3편

"이혼을 허락할 수 없다"

1638년, 환향녀(還鄕女)를 둘러싼 조정의 격돌
부제: 영의정의 며느리 축출 상소와 최명길의 반박, 국가의 무능을 여성에게 전가한 나라
기본 정보: 《인조실록》 16년(1638) 3월 11일 / 사건 ID: IR-0070
1. 한양 시댁의 굳게 닫힌 대문
1638년(인조 16) 3월 11일, 삼전도의 굴욕(1637)이 한반도를 짓밟고 지나간 지 1년여 뒤의 한양. 청나라 심양의 노예 시장으로 끌려가 짐승만도 못한 고초를 겪다가, 가족들이 가산을 탕진하며 막대한 속전(몸값)을 치르고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살아 돌아온 수만 명의 피랍 부녀자들, 곧 ‘환향녀(還鄕女)’들이 있었다.

그러나 고향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맞이한 것은 따뜻한 위로가 아니었다. 사대부 시댁의 대문은 차갑게 닫혀 있었다. 가부장적 성리학의 도덕률에 젖어 있던 양반 남편과 시부모들은 오랑캐에게 끌려갔다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며느리와 아내를 ‘정절을 잃은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찍고 문전박대하며 내쫓았다.
2. 영의정의 이혼 청원과 예조의 동조
사태는 마침내 조선 최고위 권력층의 법적 이혼 청원으로 비화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신풍부원군인 영의정 장유가 인조에게 정식 상소를 올린 것이다.

"신의 외아들 장선징의 처(한씨)가 호란 중에 청나라로 잡혀갔다가 속환되어 돌아왔습니다. 비록 살아 돌아왔으나 몸을 더럽혀 종묘사직의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되었으니, 청컨대 며느리를 내치고 새 며느리를 맞아 가문의 대를 잇게 허락하여 주소서."

예조와 대다수 서인 사대부들은 장유의 편을 들었다. 유교 가부장제의 규범을 들어 정절을 잃은 여인이 조상의 제사를 주관하는 것은 불경이므로, 가문의 명예를 위해 이혼을 허락하는 것이 성리학적 예법에 합당하다는 논리였다.
3. 최명길의 고독한 절규: "국가의 죄를 왜 여인에게 묻는가"
조정 전체가 환향녀들을 버리려던 그 비정한 순간, 홀로 분연히 일어나 사대부들의 위선을 질타한 거인이 있었다. 영의정 최명길이었다.

최명길은 인조의 어전에서 피를 토하듯 반박했다. "전쟁이 터져 처자식을 지키지 못하고 오랑캐에게 끌려가게 만든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바로 우리 조정과 사대부 남성들이 무능하여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입니다! 국가가 힘이 없어 백성을 지켜주지 못해놓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여인들에게 ‘왜 자결하여 정절을 지키지 않았느냐’며 이혼을 허락한다면, 이는 수만 명의 환향녀들을 영원히 이역의 원혼으로 내모는 천인공노할 잔혹한 짓입니다!"

최명길은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저버린 성리학적 명분론의 잔인함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4. 이혼 불허령과 지워지지 않은 편견의 상처
인조는 격론 끝에 최명길의 충언을 받아들여, 사대부가의 환향녀를 함부로 내치거나 이혼할 수 없도록 ‘환향녀 이혼 불허령’을 내렸다.

그러나 국법의 보호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 사회의 냉대와 멸시는 사라지지 않았다. ‘환향녀’라는 말은 여인들의 정조를 비하하는 멸칭(화냥년)으로 왜곡되어 수백 년간 여성들의 가슴에 주홍글씨로 남았다.

실록에 박제된 1638년의 이혼 논쟁은, 국가의 패배와 무능의 책임을 가장 연약한 전쟁 피해자 여성들에게 전가하려 했던 유교 지배층의 추악한 민낯과, 그 야만에 맞서 인간의 양심을 지켜내려 했던 역사의 뼈아픈 기록이다.
[사료를 펼쳐보면]
출전: 《인조열헌대왕실록(仁祖實錄)》 권36, 인조 16년 3월 11일 갑술(甲戌) 2번째 기사
원문 대목:新豊府院君張維啓曰: "子婦被擄還鄕, 義不可合, 請許離婚。" 崔鳴吉曰: "被擄之婦, 乃國家之罪, 豈可使之失所! 斷不可許。" 上從鳴吉議.
국역문:신풍부원군 장유가 아뢰기를 "자부(며느리)가 사로잡혀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의리상 합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혼을 허락하소서" 하니, 최명길이 말하기를 "사로잡힌 부녀는 곧 국가의 죄인데 어찌 그들로 하여금 갈 곳을 잃게 하겠습니까! 결단코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명길의 의논을 따랐다.
[이 기록이 특별한 이유]
국가 책임론의 대두: 패전의 책임을 개인의 윤리적 흠결로 치부하던 당대 사대부들의 위선에 맞서, 영의정 최명길이 "포로가 된 것은 국가의 죄"라며 국가의 구조적 책임을 공적 기록에 명시한 기념비적 사료다.
명분론과 실용주의의 충돌: 의리명분론에 갇힌 서인 주류와, 인간 생명과 실리를 우선한 양명학적 실용주의자 최명길의 세계관 충돌을 보여준다.
[조선의 시스템: 환향녀와 칠출삼불거]
환향녀(還鄕女)와 속환(贖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50만 명 이상의 포로가 끌려갔으며, 은 수십~수백 냥의 몸값(속전)을 치르고 돌아온 부녀자들을 환향녀라 불렀다.
칠출삼불거(七出三不去): 《경국대전》상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7가지 사유(칠출)가 있어도, 돌아갈 친정이 없는 경우 등 3가지 상황(삼불거)에서는 이혼을 금지했던 법적 보호 장치.

패배한 국가의 사대부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고결한 예법이 아니라, 자신들의 부끄러운 무능을 가릴 비겁한 명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