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 글자를 왜 시험 봅니까”
1444년, 훈민정음 시험을 거부한 집현전 학사들
부제: 최만리의 6조 반대 상소와 세종의 격노, 문자 독점 카르텔을 부순 군주의 투쟁
기본 정보: 《세종실록》 26년(1444) 2월 20일 / 사건 ID: IR-0082
1. 편전 바닥에 내던져진 집단 상소문
1444년(세종 26) 2월 20일, 한양 경복궁 편전. 세종대왕이 비밀리에 연구하여 완성한 스물여덟 자의 새 문자 ‘훈민정음’의 창제 사실이 알려지고, 하급 관리 선발 시험(이과)에 훈민정음을 필수 과목으로 도입하라는 어명이 떨어진 직후였다.
국왕이 가장 아끼고 신임하던 최고 두뇌 집단 집현전(集賢殿)의 수뇌부가 일제히 붓을 꺾고 들고일어났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필두로 직제학 신석조, 응교 정창손, 교리 하위지 등 핵심 학사들이 연명으로 작성한 장문의 상소문이 세종의 어전 바닥에 내던져졌다. “대국(명나라)을 섬기는 유교 국가에서 한자를 버리고 오랑캐의 새 글자를 시험 보는 것은 천하의 수치이옵니다! 전하, 언문 시험과 보급을 즉각 중단하소서!”
2. “너희가 운서(韻書)의 이치를 아느냐!”
최만리 등은 6개 조목을 들어 훈민정음을 맹비난했다. “한자만으로도 성현의 도리를 밝히기에 족한데, 배우기 쉬운 천한 글자를 가르치면 선비들이 성리학을 멀리하고 백성들이 조급해질 것입니다.”
심지어 정창손은 “《삼강행실도》를 번역해 가르친다고 해서 어찌 충신과 효자가 나오겠습니까”라며 백성의 교화 가능성을 원천 부정하는 망언을 쏟아냈다. 병환 속에서도 눈이 짓무르도록 백성을 위해 글자를 만들었던 세종의 분노가 폭발했다. “너희들이 음운(운서)의 이치를 정녕 안단 말이냐! 백성들이 억울한 죄를 짓고도 글을 몰라 관아에 자신의 사정을 하소연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을 불쌍히 여겨 만든 글자이거늘, 너희 선비들이 사대주의의 허울에 갇혀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어찌 유학자의 도리란 말이냐!” 세종은 정창손의 관직을 삭탈하고 최만리 등을 의금부에 하옥하도록 명했다.
3. 문자 독점 카르텔과 사대부의 계급적 공포
집현전 학사들의 반발은 단순한 학문적 견해 차이가 아니었다. 조선 사대부들에게 ‘어려운 한자’는 자신들만의 배타적 권력과 신분을 유지해 주는 가장 강력한 기득권의 성벽이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 유교적 통치의 근간이었는데, 만약 모든 백성이 글을 읽고 쓰게 된다면 사대부의 도덕적 권위와 지배 체제가 뿌리째 흔들릴 것이라는 계급적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최만리 일파의 상소는 지식과 문자를 독점하려 했던 지배 계급의 집단 이기주의의 표출이었다.
4. 의금부 하옥을 넘어 활짝 핀 백성의 문자
세종은 최만리와 학사들을 의금부에 가두며 단호한 결기를 보여준 뒤, 이튿날 그들을 석방하면서도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등 소장파 학자들을 규합해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과 이과(吏科) 시험 도입을 완수했다. 실록에 박제된 1444년 집현전 학사들의 집단 파업 사건은, 기득권의 완강한 저항을 뚫고 백성의 손에 ‘빛나는 문자’를 쥐여주고자 했던 세종대왕의 위대한 고독과 투쟁의 역사를 증언한다.
[사료를 펼쳐보면]
출전: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實錄)》 권103, 세종 26년 2월 20일 갑자(甲子) 기사 맥락
원문 대목: 集賢殿副提學崔萬理等上疏, 痛陳諺文制作之非。 上震怒, 詰問駁論, 下萬理等于義禁府。
국역문: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하여 언문 제작의 잘못됨을 통렬히 진술하였다. 상이 크게 노하여 힐문하고 반박하며 최만리 등을 의금부에 내리셨다.
[이 기록이 특별한 이유]
문자 창제 논쟁의 공식 기록: 한글 창제 직후 사대부 지배층이 제기한 반대 논리와 이에 맞선 세종의 애민주의적 반박이 실시간 토론 형태로 실록에 등재된 핵심 1차 사료다.
언어학적 권위의 대결: 국왕이 집현전 최고 학자들을 향해 '음운학(운서)의 이치'를 직접 논박하며 학문적 우위를 증명한 역사적 순간이다.
[조선의 시스템: 집현전과 이과(吏科) 언문 취재]
집현전(集賢殿): 세종이 학문 연구와 정책 자문을 위해 확대한 왕립 학술 기관으로 훈민정음 창제와 실록 편찬의 산실.
이과 언문 취재(吏科 諺文 取才): 중앙과 지방 관아의 실무 행정을 담당하는 서리(아전)를 선발할 때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으로 삼아 국가 행정에 즉시 보급하려던 세종의 인사 정책.
기득권의 오만한 성벽을 허물고 백성의 손에 글자를 쥐여주고자 했던 세종의 고독한 결단은, 지식이 권력의 도구가 아닌 인간 존엄의 권리임을 선언한 혁명이었다.